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작구 을 (문단 편집)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 ||<-4> {{{#ffffff {{{+1 '''동작구 을'''}}}}}}[br]{{{#ffffff 흑석동, 상도1동, 동작동, 사당1동, [br] 사당2동, 사당3동, 사당4동, 사당5동}}} || ||<|2>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 '''정당''' || '''득표율''' || '''비고''' || ||<|2> {{{#ffffff {{{+5 '''1'''}}}}}} || [[정동영|{{{#373a3c,#dddddd 정동영}}}]](鄭東泳) || 36,251 || 2위 || || '''[include(틀:통합민주당(2008년))]''' || 41.50% || 낙선 || ||<|2> {{{#ffffff {{{+5 '''2'''}}}}}} || '''[[정몽준|{{{#373a3c,#dddddd 정몽준}}}]](鄭夢準)''' || '''47,521''' || '''1위''' || || [include(틀:한나라당)] || '''54.41%''' || '''{{{#000000 당선}}}''' || ||<|2> {{{#ffffff {{{+5 '''4'''}}}}}} || 김지희(金芝希) || 1,060 || 4위 || || [include(틀:민주노동당)] || 1.21% || 낙선 || ||<|2> {{{#ffffff {{{+5 '''6'''}}}}}} || 나용집(羅庸集) || 400 || 5위 || || [include(틀:기독사랑실천당)] || 0.45% || 낙선 || ||<|2> {{{#ffffff {{{+5 '''7'''}}}}}} || [[김종철(1970)|{{{#373a3c,#dddddd 김종철}}}]](金鍾哲) || 1,758 || 3위 || || [include(틀:진보신당)] || 2.01% || 낙선 || ||<|2> {{{#ffffff {{{+5 '''8'''}}}}}} || 정연중(鄭然中) || 51 || 7위 || || [include(틀:통일한국당(2007년))] || 0.05% || 낙선 || ||<|2> {{{#ffffff {{{+5 '''9'''}}}}}} || 옥윤호(玉允豪) || 291 || 6위 || || [include(틀:평화통일가정당)] || 0.33% || 낙선 || ||<|3> '''계''' || '''선거인 수''' || 154,470 ||<|3> '''투표율'''[br]56.83% || || 투표수 || 87,793 || || 무효표수 || 461 || 현역 이계안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이 지역의 선거구도는 안갯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는데 당초 한나라당에서는 교총 회장 출신의 [[이군현]] 비례대표 의원을 이곳에 공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직전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였던 [[정동영]]이 수도권 백의종군을 선언하면서 동작 을 지역 출마를 선언하게 되고, 이에 한나라당에서는 이군현 후보를 고향인 경남 통영, 고성 선거구로 보내고 17대 대선을 앞두고 입당한 '''[[정몽준]] 의원'''[* 2009~2010년에 한나라당 대표를 맡긴 했지만, 사실 정몽준은 1988년에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1990년 새해 3당 합당 과정에서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보수세력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1992년에 민주자유당을 나가서, 통일국민당, 무소속, 국민통합21 등을 전전했고, 이 당시에 친 민주당(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성향을 띄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과 갈라서면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아닌 독자활동을 펼치다가, 2007년에 한나라당에 입당하며 무려 15년만에 되돌아 온 셈이 되었다.]을 여기에 전략공천하면서[* 동시에, 정몽준의 오랜 측근이자, 보좌관인 [[안효대]]가 울산 동구 을 지역구를 물려받았다.], 당시 동작 을 선거구는 총선 최고의 빅매치 중 하나로 전국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초반에는 팽팽하게 흐르는 듯했지만, 정몽준 후보가 뉴타운 공약을 내걸고 민심을 공략하기 시작하면서 선거 구도는 급격히 한나라당 우세의 분위기로 흘렀다. 여기에 정동영 후보에게는 대선 참패의 책임론이 가시지 않았다는 비판도 더해졌다. 결국 당초 치열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정몽준 후보가 1만여표 차이로 무난히 6선의 고지에 오르게 되고, 한나라당 내에서 본인의 입지를 굳히며 후에 최고위원 및 당대표까지 역임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